경허 대선사

鏡虛(경허) 화상 碑文(비문)

曹溪(조계)의 물 한 방울이 淸溪寺(청계사)에 스며들 때 허공은 찢어지고 둥근 마음 달은 萬象(만상)을 삼키었다.

그래서 무릇 한국 近世禪(근세선)의 조계 正脈(정맥)을 논함에는 鏡虛(경허) 화상을 그 本(본) 으로 삼는다.

和尙(화상)의 自得(자득)한 境界(경계)는 五家(오가)의 家風(가풍)을 두루 갖추었고 大機大用(대기대용)의 機鋒(기봉)은 근세 百年(백년)에 앞에도 뒤에도 그 만한 禪匠(선근)이 없는 채 홀로 보배롭게 빛났다. 飮酒食肉(음주식육)이 不碍菩提(부득보리)인 경계에서 형식주의적 苦行( 고행)을 거부한 禪家(선가)의 解放思想(해방사상)을 現(체현) 했으니 人爲(인위)를 버린 無鼻孔(무비공)은 內心(내심)의 법당을 떠받치는 기둥이요 空靈(공혼) 초월의 風狂(풍광)은 物我同化(물아동화)와 和光同塵(화광동려)의 대들보였다. 사람됨이 大凡(대범)하여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화상의 隨心所欲(수심소욕)은 空無(공무)의 절대 자유였고 禪家(선가)의 規矩(규구)가 아님이 없었다.

하늘을 뛰어넘고 땅을 뽑아내는 기운으로 無爲(무위)를 행하여 저절로 奇異(기이)하게 되었으니 有(유)와 無 (무)에도 머무르지 않는 것으로 本源(본원)을 꿰뚫었고 고요함을 여의었으되 움직임도 아니었다. 境界(경계)를 없애지 않고 會心(회심)한 心要(심요)와 逢場作戱(봉장작희)는 俗塵(속진)을 털어내 주는 수도자의 면모였다. 調心(조심)을 할 뿐 調身(조신)은 하지 않으니 참으로 超佛越俎(초불월조)를 지향한 大機(대기) 요 伯夷(백이)의 마음이며 泰伯(태백)의 자취였다.

禪旨(선지)는 平常心(평상심)의 절대 자유와 일체 평등사상에 철저했으니 天藏庵(천장암) 의 裸 法門(나체법문)에서는 마음 속 가득한 神秘(신비)를 드러내 보였고 海印寺 懶女同宿(해인사 나여동숙)에서는 禪思想(선사상)의 저류를 이루는 風狂(풍광)의 철학이 閃光(섬광)을 發(발)했다.

이처럼 萬變(만변)의 方便(방편)을 활용하면서도 언제나 自若(자약)했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가운데서 法度(법도)를 초월해 나가니 그 어느 것 하나 無爲法(무위법) 을 따르는 平常心(평상심) 아님이 없었다. 수많은 禪院(선원)을 창설하여 無念(무념)의 禪法(선법)과 羚羊掛角(영양괘각)의 行化(행화)를 펼쳤고 晩年(만년)에는 口 (과구)를 벗어던지는 격렬한 還俗(환속) 회향으로 祖師門(조사문)의 和光同塵(화광동려)을 現(체현)하면서 文才(문재) 넘치는 禪詩(선시)들을 쏟아내니 그 멀고 가까움을 감히 측량하기 조차가 어려웠다. 화상의 俗姓(속성)은 여산 宋(송)씨고 속명은 東旭(동욱)이다. 법호는 鏡虛(경허)고 諱(위)는 惺牛(성우)다.

1846 년 8 월 24 일 全州 子東里(전주 자동리)에서 父 宋斗玉(부송두옥)과 母(모) 밀양 朴(박)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홉 살에 경기도 의왕시 淸溪寺(청계사)에서 桂虛( 계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열네 살에 계룡산 東鶴寺(동학사)로 내려가 萬化普善(만화보선) 강백 밑에서 大 小乘(대소승) 경전과 儒家 道家(유가 도가)의 경전을 섭렵했다.

23 세에 동학사 강사가 되어 이름을 드날렸다.
1879 년 옛 은사를 찾아뵈러 가다가 天安(천안) 근처서 창궐한 콜레라로 마을에 屍身(사신)이 널려있는 참혹한 현장을 보고 크게 발심하여 동학사로 되돌아와 靈雲(영운) 선사의 화두 驢事未去 馬事到來(려사미거 마사도래)를 들고 정진하던 중 11 월 15 일 마을 선비가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는 無鼻孔(무비공)을 말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활연대오했다. 다음해 봄 연암산 天藏庵(천장암) 으로 가서 1 년여 동안 保任(보임) 하고 난 후 , 開悟詩(개오시)를 읊고 20 여년에 걸쳐 40 여 道場(도장)에서 法座 ( 법좌)에 올랐다.

1898 년 범어사에 영남 최초의 禪院(선원)을 개설했고 다음해에는 해인사 조실로 住錫(주석)하면서 修禪社(수선사)를 결사하여 法主(법주)가 되니 湖西(호서)의 定慧寺 能仁禪院(정혜사 능인선원)을 비롯한 호남 영남일대의 선원 창설을 통한 禪風(선풍) 진작은 근세 禪宗史(선종사)의 金子塔(금자탑)이다.

1904 년 오대산 月精寺(월정사)를 거쳐 금강산을 유람하고는 안변 釋王寺(석왕사)로 가서 5 백 나한 改金佛事(개금불사)의 증명 법사로 법문을 설한 후 江界(강계)로 들어갔다.

1905 년부터는 朴蘭洲(박난주)라는 이름으로 禪宗 二祖(선종 이조)의 入世(입세) 처럼 佛卽衆生(불즉중생)의 不二門(불이문)을 열고 俗塵(속진)에 뛰어들었다. 1910 년 강계서 甲山(갑산)으로 옮겨 웅이방 도하동에 서당을 열고 訓長(훈장)을 하다가 1912 년 4 월 25 일 心月孤圓 光呑萬象 光境俱亡 復是何物(심월고원 광탄만상 광경구망 복시하물)이라는 臨終偈(임종게)를 남기고 遷化(천화)했다.

다음해 여름 滿空(만공)과 慧月(혜월)이 화상의 천화를 알리는 서신을 받고 달려가 갑산 웅이면 難德山(난덕산)에서 土葬(토장)을 열어 如法(여법) 하게 茶毘(다비) 를 봉행했다.

만공 대선사

曹溪嗣祖滿空堂月面大宗師碑銘幷序

唯釋尊入滅後 二千四百九十年 ( 西紀 一千九百四十六年 ) 丙戌 十月 二十日 滿空大禪師께서 示滅하시니 世壽는 七十有五요 法臘은 六十有二시니 世尊 傳燈後 七十有六代 法孫이시다. 嗚呼라 ! 禪師의 尊像은 孤月이 天心에 걸린 모습인가 , 禪師의 風澤은 山高水長인가. 淸淨本然 一喝 獅子吼로 中正門을 擘開하시니 乾坤이 位焉이요 萬物이 育焉이로다. 禪師의 兒名은 道巖이요 尊諱는 月面이시며 , 法號는 滿空이시다. 俗姓은 礪山 宋氏요 考諱는 神通이요 는 金氏이시다. 全羅北道 泰仁郡 泰仁邑 上一里에 生하시었다. 靈龍이 神珠를 吐하매 光明이 恍惚함을 胎夢으로 받고 , 月滿에 出生하시니 時節은 高宗 二年 ( 西紀 一千八百七十一年 ) 辛未 三月 七日이었다.

十三歲時에 金堤 金山寺와 全州 鳳棲寺를 거쳐 論山 雙磎寺를 지나 鷄龍山 東鶴寺에 가서 眞巖老師를 拜謁하고 出家 安住하게 되었다. 甲申年十月 初旬에 六尺이 넘는 體軀에 威風이 堂堂하고 眼光이 赫赫한 客僧이 오셨는데 , 天藏寺에서 오신 鏡虛和尙이였다. 同居中에 老師께서 “ 이 兒童이 非凡하오니 和尙이 指導하여 佛法에 棟樑이 되게 해 주십시오.” 付託하였다. 그런 法緣으로 禪師는 忠南 瑞山 天藏寺에 住錫한 泰虛스님을 侍從하게 되었다. 그해 十二月 八日에 泰虛和尙을 恩師로 鏡虛禪師를 戒師로 受戒得度하고 法名을 月面이라하였다. 其後 二十五歲 癸卯年 十一月 一日에 十七八歲로 보이는 草笠童이 天藏寺에 와서 同宿하게 되었는데 묻기를 “ 萬法歸一一歸何處만 깨달으면 生死를 解脫하고 萬事에 無不通知라 하는데 , 무슨 뜻입니까 ” 하거늘 前後가 茫茫하여 苦痛스럽고 안절부절 答을 주지 못했다. 其後로 萬法話頭에 疑團이 獨露하여 發忿忘食이였다. 혼자 篤實精進 願力을 세우고 아무도 몰래 溫陽 鳳谷寺로 가서 爐殿을 보면서 精進을 계속 이어가던 중 , 乙未年 七月 二十五日에 東壁을 기대고 西壁을 바라보던 중 , 忽然히 壁이 무너지고 一圓相이 이어졌다. 새벽 鐘頌을 할 때 , ‘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 를 외우다가 法界性과 華藏刹海가 열리니 歡喜踊躍을 禁할 수 없었다. 마침내 ,
空山理氣古今外
白雲淸風自去來
何事達摩越西天
鷄鳴丑時寅日出
이라고 悟道頌을 지어 읊었다.

其後로 禪師는 만나는 사람마다 “ 나에게 稀有法이 있으니 함께 精進하자.” 고 懇切히 提意하니 사람들은 禪師의 境界를 알지 못하고 , 말하기를 “ 昨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夜間에 미쳤다.” 고 비웃기에 大衆과 함께 머무를 수 없어서 智異山 靑鶴洞을 향해 떠났다가 여의치 않아 다시 되돌아와 公州 麻谷寺에 들리니 翁師이신 普鏡和尙이 “ 내게 土窟이 있으니 거기서 精進하라.” 고 하시거늘 , 그곳에 坡田을 일구고 三年동안 延命做工하였다. 二十六歲 丙申年 七月 十五日에 鏡虛禪師가 枉臨하시매 그 精進해서 悟道한 落處를 一一이 呈似하니 , 禪師가 火中生蓮이라고 激勵해주셨다. 鏡虛和尙이 묻기를 “ 藤토시와 美扇이 있는데 藤토시를 扇이라고 하는 것이 옳으냐 , 扇을 藤토시라 하는 것이 옳으냐 ” 하거늘 “ 다 옳습니다.” 한즉 ,

“ 네가 일찍이 茶毘文을 보았느냐 ”“ 예 , 보았습니다.” 한즉 “ 有眼石人齊下淚라 하니 무슨 뜻인고 ” 하시거늘 “ 모르겠습니다.” 한즉 “ 有眼石人齊下淚도 모르고 어찌 扇과 藤토시를 안다 하리요.” 禪師가 다시 이르되 “ 萬法歸一一歸何處는 進步가 더디니 다시 趙州 無字話頭를 드는 것이 옳다. 圓頓門을 짓지 말고 徑截門을 다시 지어라.” 고 하고 떠나셨다. 그 후로 無字話頭를 열심히 疑心하던 중 , 날이 갈수록 鏡虛禪師를 敬慕하는 마음이 切實하여 禪師가 계신 瑞山 浮石寺로 찾아가 侍奉하게 되었는데 , 날마다 法을 問하여 玄玄妙理를 琢磨해 주셨다.

梵魚 鷄鳴禪院에서 枕雲스님과 禪師를 모시고 夏安居를 마치고 拜別한 후 , 通度 白雲庵으로 갔다. 마침 長霖時期라 보름동안 갇혀 있던 중 , 새벽 鍾頌을 듣고 再次 豁然大悟하니 百千三昧無量妙義를 얻어 了事丈夫가 되었다. 三十一歲 辛丑 七月 末頃에 本寺에 돌아와 飢來喫飯 , 困來打眠하여 騰騰逍遙하였다. 三十四歲 甲辰年 七月 十五日에 鏡虛禪師께서 咸鏡道 甲山으로 遁跡 길에 天藏寺를 들리게 되었다. 其間 勇猛做工과 保任過程을 一一이 報告하니 禪師께서 許諾印證하시며 雲月溪山處處同山禪子大家風慇懃分付無文印一段機權活眼中라고 傳法偈를 내리셨다.

連하여 滿空이라 賜號하시고 “ 佛祖慧命을 付囑하노니 不忘信之하라.” 하시며 飄飄히 杖子를 떨치고 떠나셨다. 스님은 또한 頭陀行으로 山川을 游歷하시다가 乙巳年 仲春에 德崇山에 茅菴을 지어 金仙臺라하고 住錫保任하니 諸方衲子가 雲集하여 說法을 請하거늘 謝讓하다못해 法座에 오르니 이것이 佛祖慧命을 相繼하는 開堂普說이었다. 其後로 修德寺 定慧寺 見性菴을 重創하여 四部禪衆을 提接하여 禪風을 振輝하였으며 , 金剛山 揄岾寺 摩訶衍에서 三夏安居를 지내셨으며 , 다시 德崇山으로 歸來하시여 瑞山 安眠面 看月島에 看月菴을 重創하셨으며 , 德崇山 東便 山頂에 一間茅屋을 지어 轉月舍라 이름하고 홀로 轉月하시다가 어느날 沐浴端坐하시고 圓鏡에 照映한 自己모습을 보고 , “ 離別할 因緣이 되었네.” 라고 大笑하시고 , 儼然入寂하셨다. 茶毘中에 忽然히 白鶴이 나타나 雲煙上에 徘徊하고 , 五色光明이 昇天하더라. 歡喜와 奇異한 信心속에 茶毘를 마친 후 , 靈骨을 모아 滿空石塔에 奉安하였다. 此其 禪師의 悟道와 保任修行의 略歷이요 , 그 偉大한 行化經歷은 滿空法語集에 參考로 돌릴 뿐이다. 回顧컨대 , 鏡虛老師의 禪田에 法幢을 建立하여 祖道를 激揚하니 花爛錦山에 門庭이 宏 하고 機鋒이 峻嚴하여 逍遙蕩蕩한 浩浩莫窮을 凡情으로 測度하기 어려우며 , 또한 日本總督 南次郞의 倭寇逆心을 一喝 獅子吼로 擊碎해 버리는 威風巍巍한 모습과 , 龍雲禪師께서 “ 一喝도 좋지만 왜 總督을 棒頭로써 罵打하지 않았느냐 ” 는 물음에 呵呵大笑하시면서 “ 喫茶去하게나. 是狐狸子여. 痴熊은 棒을 휘두르지만 , 獅子는 一喝을 할 뿐이다.” 하시니 待機의 殺活寶劍이 마치 莫涯한 空 에 杳杳飛鳥처럼 其 跡을 찾을 길 없으며이어서 龍城의 虛空亦老와 錦峰의 自起自倒와 田岡의 雪山乳香과 眞性侍者와의 以點燈火等 禪問擧揚으로 看話禪의 眞髓를 露出하여 碧眼宗師를 陶冶 鍊鍛하여 禪燈을 相續케 하니 禪風의 盛大함이 一世를 蓋冠하였다.

銘曰 三尺古琴에 三玄曲튕기다가 海濤金波에 孤月을 굴리는가. 黃鶴樓 부수더니 鸚鵡洲 水聲마저 끊기네 ! 而靈兮여 卓卓妙存인 모습 靜而應兮여 塵塵刹刹이로다. 世界一花 百草佛母 窓 에 걸어두고 春草는 한데 金仙臺 뜨락 비었어라. 巍巍堂堂 萬像中獨露여 明明歷歷 百草上에 뵈올까. 離相離言이여 奚捨奚取리요. 嗚呼禪師여 功德은 山光처럼 一碧萬古로다.

보월 대선사

‘문자의 감옥’탈주 지혜에 닿다

충남 예산군 봉산면 국도에서 울창한 숲길을 10여분 오른다. 보덕사다. 샘가에선 단아한 비구니들과 행자가 과일과 야채를 씻고 있다. 봄볕 아래 빛나는 비구니의 빈 머리가 과일보다 오히려 싱그럽다.
보덕사는 보월 선사(1884~1924)가 너무나도 짧은 삶을 불태웠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비구니들의 수행처로 바뀌었다.
보월은 만공 선사(1870~1946)의 수제자다. 그러나 그에 대한 책도, 기록도, 사진 한 장도남아 있는 게 없다.
20세기 초 한국의 선사 중 만공의 덕화를 입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로 만공은 선지를 드날리며 수많은 견성(깨달음) 도인을 길러냈다. 훗날 일세를 풍미하며 세상의 추앙을 받는 만공의 많은 제자들 가운데 보월은 단연 봉황이었다.

보월에 대해 알만한 이를 수소문 한 끝에 충남 태안 안면도 송림사 소나무 숲 움막에 숨어 지내는 동산 선사(92)를 찾았다. 동산 선사는 만공으로부터 전법게(깨달음의 인가)를 받은 유일한 생존자다. 만공은 보월이 제자 금오 선사(1896~1968)에게 전법조차 못하고 입적하자 보월을 대신해 전법게를 내렸다. 그래도 보월의 법맥을 튼실하게 하고 싶던 만공은 동산에게도 전법게를 내리면서 ‘보월의 법을 이었다’고 했다.

보월은 동산이 행자 때 이미 열반해 얼굴 한 번 볼 수 없었으나 큰스승 만공이 맺어준 법은사였으니 동산이 보월의 삶의 여적에 귀가 기울여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보월의 출가 전 삶에 대해선 더욱 더 알려진 것이 없으나, 그는 충남 서산 운산면에서 태어나 결혼해 두 아들까지 두었다고 한다. 그가 왜 집을 나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처음엔 이 마을 저 마을을 유리걸식하는 탁발승이었다. 밥을 더 쉽게 빌어먹기 위해 머리를 깎고 동냥질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시절이었다.

보월선사가 불과 30대의 나이에 선승들을 깨달음으로 이끈 보덕사.
유리걸식 동냥질하다 만공 찾아 선승의 길 깨달음 ‘게송’지어 보이자 “그것말고!”몽둥이 찜질 스승도 한때 글에 갇히니 보월이 꾸짖어 참선케 마흔 열반들자 만공 통곡 동냥중들과 떼로 몰려 다니던 그가 어느 날 홍성 월산암에서 하루 밤 잠을 자게 됐다. 그 때 월산암을 지키던 만공의 속가 형인 대은 스님은 보월에게 “일단 중이 되었으면 견성을 해야 하고, 견성을 하려면 참선을 해야 한다”며 “그러려면 만공 선사를 찾아가라”고 충고했다.

그는 그 즉시 덕숭산 위 정혜사로 올라갔다. 힘이 장사였던 그는 디딜방아를 찧어 참선하는 수좌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겨우 말석에서 참선을 시작했다. 걸인 보월은 하루가 다르게 수좌(선승)로 변모해갔다. 어느 날 보월이 눈 앞이 툭 트인 듯하자 게송(깨달음의 시)을 지어 만공에게 갔다. 게송을 적은 종이쪽지를 한 손으로 받은 만공은 글을 읽지도 않은 채 다른 한 손을 내밀었다.

“아니, 게송을 드렸지 않습니까?”

“이것 말고!”

보월은 어안이 벙벙했다. 무엇을 또 내놓으란 말인가. 보월은 만공에게 방망이로 흠씬 두들겨 맞은 채 방에서 쫓아나고 말았다. 스승 만공이 때려 부순 것은 보월의 몸뚱이가 아니라 아직도 그가 갇혀 있던 글과 깨달음이란 관념의 감옥이었다. 글은 전했지만 ‘글 밖의 소식’을 들려달라는 스승의 요구에 응대조차 못한 것이다.

그리고 몇 년 뒤였다. 만공과 같은 경허의 제자로 부산 선암사에 있는 혜월 선사 아래서 참선하던 운암 스님이 만공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부처님이 과거의 마음도, 현재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어느 마음에 점을 찍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만공은 “위음왕불 이전(천지가 열리기 전)에 이미 다 말했다”는 답을 쓰고 있었다. 이를 본 보월은 “도대체 누구의 눈을 멀게 하려고 이런 짓을 하고 계시냐”고 준엄히 묻고선 편지를 불태워 버렸다.

제자로부터 방망이를 맞은 격이었다. 충격을 받은 만공은 산 위의 누각 금선대에 올라 7일 동안 꼼짝 않고 용맹 정진했다. 그리고 내려와 보월의 손을 잡으며 “자네가 내게 10년 양식을 주었구나”라고 기뻐했다.
글에 갇힌 자신을 깨뜨려주던 스승이 글로서 다시 남을 옥 속에 안주케 하려는 것을 본 제자가 스승을 구해준 것이다. 제자의 가르침에 다시 자신을 내던질만큼 호쾌한 ‘위인’이었던 만공은 보덕사 조실 자리를 불과 30대의 보월에게 물러주었다. 그 뒤 보덕사엔 더 많은 선승들이 몰려들었다.

보월이 불과 40살의 나이로 열반하자 만공은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고, 대중 설법 도중 피를 토하는 듯 울며 애통해 했다. 보월은 만공에게, ‘지혜 제일’이었지만 붓다보다 더 일찍 열반한 사리불이었고, 공자보다 더욱 더 빛을 발했지만 너무도 일찍 꺼져버린 안회였다.

보월의 마지막 제자 동산은 “출가자보다 재가자가 더욱 더 참선을 잘 할 수 있다”며 움막 밖까지 지팡이를 짚고 나와 불성을 깨운다. 출가자와 재가자, 걸인과 부처, 스승과 제자가 둘인가, 하나인가. 안면도와 서해안을 따른 상경길이 산과 들, 호수와 바다를 가른다. 그러나 황혼녘 낙조가 물들지 않은 곳이 어디 있던가.

금오 대선사

曹溪嗣祖金烏堂太田大宗師碑銘幷序

스님은 一千八百九十六年 七月 二十三日 已時에 全南 康津郡 兵營面 朴東里에서 아버지 東萊 ? 氏 用甫와 어머니 趙氏의 次男으로 태어났다. 스님의 法名은 太田이요 法號는 金烏이시다.

어릴 적부터 天性이 强直하고 氣質이 出衆하여 글방에서 공부하던 중 뜻한바 있어 十六歲에 敢然히 出家하시게 되었다.

그 길로 江原道 金剛山 摩訶衍禪房을 찾아 道庵亘玄禪師를 恩師로 得度祝髮하였다. 그 後 釋王寺 內院庵 , 五臺山 月精寺 , 靈鷲山 通度寺 , 千聖山 彌陀庵禪院에서 정진하였다.

二十八歲 ( 一千九百二十三年 ) 때 寶月禪師로부터 印可를 받고 그 嗣法弟子가 되었다. 그 뒤 寶月禪師의 갑작스런 入寂으로 一千九百二十五年 二月에 德崇山 定慧寺禪院에서 그의 스승인 滿空禪師가 寶月의 嗣法을 證明하는 建幢式을 代身하여 주었다.

그 뒤 十餘年간 끊임없이 정진을 계속하여 때로는 乞食行脚으로 또는 깊은 山中에서 土窟生活로 혹은 뭇 乞人들과 더불어 同宿同食하면서 無碍行과 雲水行脚으로 山川을 주유하며 만행수도도 하신 近代 이 나라 불교의 대 선지식이었다.

四十歲 ( 一千九百三十五年 ) 時 金泉 直指寺의 祖室을 시작으로 道峰山 望月寺 , 智異山 七佛庵 , 서울 禪學院等 諸方禪房에서 衲子들을 提接하였다.
一千九百五十四年 佛敎淨化運動이 일어나자 先頭에 나서서 그 운동을 지휘하였으며 宗團機構의 監察院長 , 總務院長 , 副宗正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淨化佛事가 일단락되자 미련 없이 훨훨 털고 修道의 本鄕으로 되돌아와 서울 뚝섬 奉恩寺 , 俗離山 法住寺 , 智異山 華嚴寺에 주석하면서 後學양성에 전력하였다.
一千九百六十一年 캄보디아에서 열린 世界佛敎徒大會에 韓國佛敎 首席代表로 참가하였고 , 귀로에 홍콩 , 自由中國 , 日本等地를 들려 佛敎의 현황을 살피기도 하였다.
그 後 淸溪山 淸溪寺에 한동안 주석한 후 , 俗離山 法住寺로 다시 오셨다.

一千九百六十八年 十月 八日 陰曆 八月 十七日 午後 七時 十五分에 俗離山 法住寺 舍利閣에서 고요히 圓寂하시니 실로 韓國佛敎의 俊峰이요 鏡虛 滿空 寶月의 직계로 이 나라 禪脈의 巨木이 忽然히 사라진 것이다.

世壽는 七十三歲요 法臘은 五十七歲였다.

월산 대선사

曹溪嗣祖聖林堂月山大宗師碑文

푸른 瑞氣 마을을 덮음에 큰 빛이 밤새 産母곁을 떠나지 않았다.
一九一二年 五月 一日 신 새벽 咸鏡南道 新興郡 동상면에서 慶州崔氏 興奎居士의 아들로 태어나니 俗名은 種烈이라.
日帝下 光復에 投身 膽大함과 勇力으로 偉人을 떨게 하였으며 義와 禮로 벗을 대함에 信望이 두터웠다.
父親死亡을 接하고 煩悶하던 중 , 望月寺에서 金烏큰스님을 뵈니 , 禪師의 됨됨이를 看破하심에 虎의 膽力과 牛의 德을 갖춤이라 하시었다. 이후 金烏大禪師를 恩師로 모시니 , 그 분이 聖林堂 月山 大宗師이시다.
德崇山 滿空禪師 會上에서 當代의 善知識 滿空禪師로부터 ‘ 이뭣꼬 ' 를 받아 앉고 일어섬에 話頭를 놓지 않았고 , 滿空 , 鏡峰 , 金烏 , 田岡禪師의 가르침에 惺惺이 익어가니 , 高僧大德 무릅 가까이 禪師가 있음이었다.

修禪安居후 , 三年의 雲水行脚에서 善知識을 찾아 參究하니 , 各處에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修德寺를 떠나 恩師의 保任處이던 全南 보길도 남문사에서 비룡스님과 寢食을 물리고 勇猛精進에 드니 , 孤島에 茫茫大海라 進退가 없음이라 하시고 , 이 자리에서 한 틀을 세우리라 하셨다.
이후 경북 청도 적천사 토굴에서 한 消息을 얻으니 , 부처와 凡夫가 둘이 아니며 境界를 지음이 凡夫요 , 境界를 여윔이 부처라 이르셨다.
淸淨宗風의 緣을 모으니 , 香谷 , 靑潭 , 性徹 , 普門 , 慈雲禪師가 同參. 一九四五年 鳳巖寺에서 結社修行에 드시었다.
結社修行 중 共住淸規를 만들어 옛 祖師의 가르침을 따르니 , 곧은 僧風의 振作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禪師의 鳳巖結社를 말함에 앉은 모습이 梵鐘과 같았다하니 , 微動도 없이 泰山도 뽑을 氣勢였으며 , 울림이 은은하고 莊重하여 참으로 본받을 만하였다.

居處는 내가 擇하나 쓰임은 大衆들이 정한다 하시고 理事를 區別치 않으셨으니 , 두 번의 總務院長과 大韓佛敎曹溪宗元老會議議長 敎區本寺 俗離山 法住寺 , 雪嶽山 新興寺 , 八公山 銅華寺 住持 所任을 두루 거치면서도 行亦禪 , 坐亦禪의 자세로 어긋남이 없으셨다.
山門을 나서 돌아옴에 ? 迹이 淨하였고 , 머물러 떠남에 二邊을 짓지 않으셨으니 , 山門內에 禪師를 그윽하다 하고 山門外 禪師를 참다운 丈夫라 하나 , 이는 모두 그른 말이니 안에서는 아무것도 없고 밖에서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음이라.
一九六八年 金烏大禪師께서 入寂을 앞두고 오른손을 보이시니 禪師께서 偈頌을 올리시되 홀연히 本來事를 깨달으니 , 부처와 祖師가 어디에 있느뇨.
뱃속에 乾坤을 간직하고 , 몸을 돌려 獅子吼를 한다.

“ 세우지 않고 , 버리지 않고 , 쉬지 않는다.” 하셨다. 이에 金烏大禪師께서 大衆을 돌아보며 “ 앞으로 모든 일은 月山에게 付囑하노라.” 하셨다.
一九七四年 佛國寺에 오시어 禪院과 講院을 열고 衲子와 學人들을 提接하시니 , 禪師의 獅子吼가 吐含의 골짜기를 메웠다.
參究의 치열함이 문턱을 넘고 學人의 讀經소리 담을 넘으니 , 비로소 佛國寺가 觀光寺刹의 面貌를 一掃하고 수행도량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어느 날 禪師께서 물으시되 , “ 地球終末에는 무엇을 하려는고 ?” 大衆이 아무 말 못함에 禪師께서 一喝하시되 , “ 날마다 좋은 날인데 무엇을 걱정하랴 ” 하시었다.
一九九六年 老患에 衰하여 지셨으나 서고 앉음이 平常과 다르지 않았으니 禪師께서 苦痛中에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一九九七年 八月 老患이 危重하심에 臨終偈를 懇請하니 , “ 生에 무슨 蛇足을 더하랴 ? 일생을 돌고 돌았으나 한 걸음도 옮긴바 없나니 , 본래 그 자리는 하늘땅보다 먼저이니라.” 하셨다.

사흘 뒤 八月 五日 午後 八時 三十分 佛國禪院 염화실에서 呼吸의 境界를 破하고 寂滅에 드시니 , 鏡虛 , 滿空 , 金烏로 이어지는 二千五百년 積雪속에 月山의 足跡을 뚜렷이 새김이라.

“ 山빛은 가을날 눈이 부신데 펄펄 함박눈 쌓이고 , 禪師의 杖子 東天西土를 가르니 억 ! 의 禪氣 길이길이 吐含山에 울리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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