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사풍을 세운다
  •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17-02-07 / 조회 : 9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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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풍(居士風)을 세운다.

 

태고(太古)로부터의 소식(知音)인 기미(幾)가 의젓하거든!

이에 빛깔이 놓이면서 바람이 일고,

이에 안개가 번지면서 비가 뿌릴새,

한없는 허공중에서 한없는 산하(山河)를 나투니 이 나의 살림이요.

끝없는 성품중에서 끝없는 감정(感情)을 일으키니 이 나의 놀음이로다.

 

이러히 사(事)적인 살림이 있기에

하늘가에 떠도는 한 줄기의 구름을 걷어잡고 허공을 자질하며,

이러히 이(理)적인 놀음이 있기에

마음속에 일꺼지는 한가닥의 새김을 껴안고 성품을 손질한다.

 

실로 우주(宇宙)의 대법(大法)은

오직 한 줄기의 구름을 걷어잡고 허공을 자질함이니

이 바로 성품의 기미를 다룸이요.

인생의 공도(公道)는

오직 한 가닥의 새김을 껴안고 성품을 손질함이니

이 바로 허공의 소식을 거둠이로다.

어즈버야, 허공과 성품은 둘이 아닌 하나의 누리요

하나의 진리요, 하나인 목숨임을 입증(立證)함이 아닐까보냐.

 

어찌타, 하나인 목숨이요 진리인 누리는

제각기대로의 숱한 세계를 나투면서,

마침내엔 원치도 않는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두고

즐김터(安住處)와 뇌롬터(苦惱處)로 향하여 달리니,

이 참이냐? 이 거짓이냐? 판가름의 견줄 바 못된다.

 

그러나, 여기에 사람이 있다!

사람중에도 슬기로운 사람이 여기에 있으니

이 슬기로운 사람은 누리의 삶을 어떻게 엮는가?

오로지 수단방편(手段方便)을 다하여 생사업(生死業)을 걷어내고

적멸락(寂滅樂)을 바탕으로 세기(世紀)의 삶을 엮는다.

 

석가세존을 비롯한 역대(歷代)의 조사(祖師)와 선사(禪師)가

승가풍(僧家風)을 선양(宣揚)함도 이 때문이요,

유마보살을 비롯한 동서의 지식(知識)과 석학(碩學)이

거사풍(居士風)을 천명(闡明)함도 이 때문이니,

특히 중국(中國)의 이통현(李通玄), 배휴(裵休)와 방온(龐蘊),

해동(海東)의 윤필(尹弼), 진부설거사(陳浮雪居士) 등의 배출(輩出)은

도에 승속(僧俗)이 따로 없음을 들냄이 아닐까보냐.

 

승가풍(僧家風)은 세속(世俗)의 모든 인연(因緣)을 끊고

스승을 찾아 집을 떠난다.

한갓 떠도는 구름이요 흐르는 물이라

다만 도(道)를 구하는 마음씨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거사풍(居士風)은 그 목적이 비록 승가풍(僧家風)으로

더불어 같다고 이를지라도 그 수단(手段)과 방편(方便)이 다르다.

세속(世俗)에서 맺어진 생업(生業)을 가지고 혈연을 보살피면서

스승을 찾기는 하나 집을 지킨다.

한갓 덤불에 걸린 연이요 우리에 갇힌 매이지마는

항상 푸른 꿈이 부푼 것이 남과 다르다.

 

이러기에 승가풍은

입성부터가 단조로움도 비리(非利)를 엿보지 않음이니 공부를 짓기 위함이요,

먹성이 간략함도 음심(淫心)을 일으키지 않음이니 공부를 짓기 위함이요,

머무름이 고요로움도 자성(自性)을 어지럽히지 않음이니,

모두가 공부를 짓기 위하는 수단이요 방편이다.

까닭에 일상생활은 벌써 체계(體系)를 갖춘 도인(道人)의 풍도(風度)라 않겠는가!

 

거사풍은 그렇지가 않다.

가정을 가꾸는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에서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시간과 공간을 짜내어야 한다.

사업(事業)을 가꾸는 견문(見聞)과 각지(覺知)에서 말씨와 거동을 다스리는 견문과 각지를 짜내어야 한다.

사회를 가꾸는 도의(道義)와 신념(信念)에서 목숨과 복록을 다스리는 도의와 신념을 짜내어야 한다.

문화를 가꾸는 윤리(倫理)와 감정(感情)에서 이제와 나중을 다스리는 윤리와 감정을 짜 내어야 한다.

 

바야흐로 돌이켜 보건대

무거운 업력(業力)으로 하여금 어지러운 세정(世情) 속에서 내일을 위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인생의 원리(原理)와 누리의 본체(本體)를 캐어내는 방향으로 키를 바꿔 튼다는 사실은

입장과 조건에 따른 그 수단과 그 방편에서 비상한 각오와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승가풍 이상의 각오와 노력이 없어서는

한갓 벽에 그리어진 떡이나 마찬가지나

종요로이 큰 뜻을 세우는데 있어서만이

우리는 고(苦)에서 낙(樂)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고를 여의되

마침내엔 낙도 여윌 줄 알며,

악(惡)에서 선(善)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악을 여의되

마침내엔 선도 여윌 줄을 알며,

사(邪)에서 정(正)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사를 여의되

마침내엔 정도 여윌 줄을 알며,

생사(生死)에서 열반(涅槃)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생사를 여의되

마침내엔 열반도 여윌 줄을 안다.

 

때문에 구르고 굴리이는 온갖 차별현상은

그대로가 절대성의 굴림새로서인 상대성 놀이라는 사실을 깨쳐 알므로 하여금

법(法)을 따라 관찰하는 것으로서 수단과 방편을 삼는다.

 

무슨 까닭으로서이냐?

다시 말하자면 승가풍은 색상신(色相身)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먹고 입고 머무는데 아무런 걸거침이 없을 뿐 아니라,

시공(時空)에도 쫓기지를 않는다.

다만 선지식(善知識)과의 인연만 닿으면

도를 이룰 길은 스스럼없이 트이게 마련이지마는,

 

거사풍은 입장이 다르다.

삶을 가꾸고 엮기 위하여는

오늘을 살면서 내일을 생각하고 동(東)을 향하면서 서(西)를 살피거든!

이에 소를 탈 때에 말을 타고 말을 탈 때에 소를 타는 줄도 안다.

실로 오관(五官)을 굴려서 오식(五識)을 세우나

청정본심(淸淨本心)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음을 아는 까닭에,

 

일체법(一切法)을 그대로 굴리면서도 되돌아 일체법을 여의는 거사풍은,

현재의 사상(事象)만에 휘둘리는 중생풍(衆生風)과의 견줄 바는 물론 아니며

또한 일체법을 오로지 여의면서도 되돌아 일체법을 굴리는

승가풍의 수단과 방편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듯이 중생풍은 상대성을 껴안고 상대성 자리만에 맴도는

동중동(動中動)인 중생풍이라 친다면,

거사풍은 상대성을 휘어잡고 절대성 자리로 되돌리는

동중정(動中靜)인 거사풍이라 하겠고,

승가풍은 절대성 자리에서 상대성을 굴리는

정중동(精中動)인 승가풍이라 하겠거늘,

여기서 어떻게 꼭 같은 풍광(風光)으로서인 수단이요 방편이겠는가?

 

우리는 비록 세전(世典)으로 더불으나 보리심을 내려고 애쓴 보람에,

공덕(功德)을 갖추기 위한 탓으로 무위(無爲)에 머물지 않고,

지혜(智慧)를 갖추기 위한 탓으로 유위(有僞)에 다하지 않는 도리를 안다.

비록 범부(凡夫)는 아니나 범부법(凡夫法)을 뭉개지 않고

비록 성인(聖人)은 아니나 성인법(聖人法)을 여의지 않고

능히 범성사(凡聖事)를 다룰 줄도 안다.

 

무슨 까닭으로서이냐?

우리는 하늘과 땅의 앞소식인 나이기 때문이며

밝음과 어둠의 앞소식인 나이기 때문이며

착함과 악함의 앞소식인 나이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연(緣)을 좇으면서

비록 상대(相對)적인 색상신(色相身)을 나투기는 하지마는

실(實)로 낳음은 낳음이 아닌 거짓 낳음이기에 죽음이 따르고

죽음은 죽음이 아닌 거짓 죽음이기에 낳음을 보이는 줄을 안다.

 

이 낳음과 죽음은

바로 거룩한 나의 권리행사로서인 낳음이요 죽음이지

절대로 어떠한 성신(聖神)의 각본(脚本)에 따른 지음이 아니다.

만약 이 낳음과 죽음이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어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엮어가는 인생의 굴림새가 아니고

바로 남의 각본에 따라 지어진 것이라면

 

도대체 나라는 나는 무엇이겠는가?

주동(主動)이 아닌 피동(被動)이요, 자립(自立)이 아닌 타립(他立)이니

이것은 한낱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아니다!!

나는

색상신(色相身)으로서인 법성신(法性身)이요,

법성신(法性身)으로서인 불괴신(不壞身)이요,

불괴신(不壞身)으로서인 무변신(無邊身)이요,

무변신(無邊身)으로서인 허공신(虛空身)이니

 

되돌아

유무(有無)를 여의었기 때문에 허공신(虛空身)이요,

시종(始終)을 여의었기 때문에 무변신(無邊身)이요,

생사(生死)를 여의었기 때문에 불괴신(不壞身)이요,

미오(迷悟)를 여의었기 때문에 법성신(法性身)이요 .

정염(淨染)을 여의었기 때문에 색상신(色相身)이다.

 

이 색상신(色相身)이 바로 나이면서

법성신(法性身)의 여김을 바탕으로 나의 분별(分別)을 세우고

온갖 법을 굴리기는 하지만, 참으로 드높은 고개다.

이 고개는 승가풍으로서도 답파(踏破)하기 어렵다는

정평(定評)의 고지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니,

하물며 거사풍으로서이랴!

 

그러나 아무리 가정과 사회의 그물에 둘러싸인 거사풍일지라도

그 때와 그 곳에 맞추어서 무정법(無定法)인 수단과 방편을 세우고

숨을 거둘 때까지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면 되는 것이다.

왜냐면 나의 인생문제는 절대로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연있는 이 땅에 몸 받은 것을 기뻐하고

이 기회를 통하여

인생문제를 풀어헤치는 데의 의무와 권리를 뼈저리게 느끼되

지난날을 돌아다보면서 때가 늦은 것을 탄식하는 것보다

죽어도 내가 죽고 살아도 내가 산다는 사실 앞에

거룩한 본래의 의무와 권리를 이에 발동(發動)하여야 할 것이다.

 

허공이 끝이 없다 하여서 어찌 남의 허공이며,

산하(山河)가 다함이 없다 하여서 어찌 남의 산하랴!

인연(因緣)이 비었다 하여서 어찌 남의 인연이며

과업(果業)이 허망하다 하여서 어찌 남의 과업이랴!

 

부모형제가 소중한 것도 오로지 나의 소중한 바이요,

국가민족이 소중한 것도 오로지 나의 소중한 바이니

모든 법연(法緣)을 얼싸안고

절대성(絶對性)인 대원경지(大圓鏡智)를 향하기 위한

거사풍을 세우는 바이다.

 

이렇듯이 우리는 거사풍을 드높여서

겁(劫)밖의 인연이 있는 사람을 맞이하니,

인연이 있거든 오고 없거든 가거라.

그러나 인연은 인연이나 이름뿐인 인연이란 그 도리를 알거든

가다가 돌아오라!

 

이렇듯이 우리는 거사풍을 드높여서

생사에 두려움이 있는 사람을 맞이하니,

두려움이 있거든 오고 없거든 가거라.

그러나 두려움은 두려움이나 이름뿐인 두려움이란 그 도리를 알거든

가다가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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